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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의학의 유명인물과 서적: 한의학 관련 일화
  • 날짜 : 2009-05-25 (월) 21:2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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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 관련 일화
양예수(楊禮壽)가 범을 치료하고 주천석을 얻다.
정조(正祖) 임금의 종기를 치료한 의원 피재길(聞診)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이야기
동봉(董奉)의 행림(杏林) 이야기
독버섯과 흙탕물 - <약은 가까운 곳에 있다>
지렁이도 약이 된다
양예수(楊禮壽)가 범을 치료하고 주천석을 얻다
양예수는 16세기의 의원으로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그가 언젠가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압록강을 건너 노숙을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야음을 타 양예수를 업고 달리더니 높은 언덕 위에 내려놓고 새끼들을 물어다 그의 앞에 늘어놓았다. 호랑이는 절을 하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애걸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가 새끼 가운데 탈이 난 놈이 있나 보다 싶어 살펴보았더니, 그 중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 곧 죽을 것 같았다.
약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어 붙인 뒤 또 송진을 갈아붙이는 시늉을 하며 손가락으로 소나무를 가리키니, 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거듭 고맙다는 시늉을 하며, 검은 돌 한 조각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예수가 돌을 집어 품에 넣자 범은 그를 업어 노숙하던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그 돌맹이를 박물가(博物家)에게 보여주었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이 돌은 주천석(酒泉石)이라오. 이 돌을 물에 담궈두면 물이 술로 변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지요"

시험해 보니 정말 그러했다.
정조(正祖) 임금의 종기를 치료한 의원 피재길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전해오는 일화로, 의원 피재길의 이야기이다.
피재길은 의원 집안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종기 치료를 전문으로 했는데, 약을 잘 배합해 썼다.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재길은 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의술을 전해 받지 못했으므로, 어머니가 듣고 보았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재길은 의서를 읽은 적은 없고, 다만 약재를 모아 고약을 고는 법만 알 뿐이었다. 그는 별별 종기에 쓰이는 고약을 팔아 생활을 하며 마을을 돌아다녔으므로 감히 의원의 축에 끼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소문을 듣고 불러다 그의 고약을 써보면 자못 효험이 있었다.

계축년(1793년) 여름 정조(正祖)께서 머리에 작은 부스럼이 나 침도 쓰고 약도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고 종기는 얼굴과 턱 등 여러 부위로 점점 번져나갔다. 때는 마침 한여름이라 임금의 일상 생활이 편할 수가 없었다. 내의(內醫)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조정 신하들은 날마다 모여서 고민하였다. 그런데 재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 불러들이라 명하여 증세를 물어보았다. 재길은 지체가 비천한 탓에 벌벌 떨고 땀을 쏟으며 대답을 하지 못하니, 좌우의 내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께서 재길에게 가까이 와서 진찰하게 하시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네 의술을 다 발휘해 보도록 하라."
"신에게 한 가지 써볼 만한 처방이 있습니다."

물러가서 약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자, 곧 웅담(熊膽)을 여러 약재와 배합해 고아서 만들어 환부에 붙였다. 정조께서 며칠이면 낫겠느냐 하문하시자, 재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루면 통증이 가라앉고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재길의 말과 같았다. 정조께서 약원(藥院)에 명하셨다.

"약을 붙이고 조금 지나자 전날의 통증을 씻은 듯 잊었으니, 지금 세상에 숨은 기술과 비방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도를 상의하도록 하라"

내의원의 신하들이 먼저 내의원의 침의(鍼醫)에 차정(差定)하고, 6품의 품계를 내려 정직(正職)을 제수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정조께서 그대로 허락하셨다.
곧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을 제수하자, 내의원의 의원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이에 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졌고 웅담고(熊膽膏)는 마침내 천금가는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하여졌다.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이야기

「동의수세보원」의 저자인 이제마의 이야기는 아주 적은 부분만 전해오지만, 다음은 「인물한국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의 약국에는 병자들이 들끓었다. 그 병자들은 대개 가난하여 약 한 첩 쓸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들을 돌보았다. 어느날 한 병색의 처녀가 찾아왔다. 그는 처녀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예나 이제나 의사의 지시는 절대적인 명령에 속했으니 처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웃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나 처녀는 마지막 속치마는 아무리 의사의 지시라해도 벗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의 속옷을 낚아챘다. 그러자 그 처녀는 악을 쓰며 비명을 질러댔다. 처녀의 이런 행동을 통하여 그녀의 성정(性情)을 파악한 이제마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며 옷을 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소양인으로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했다.

한양에서 최린(崔麟)이 그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최린의 손발을 만져보고 글씨를 써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최린에게 마루옆에 쌓아놓은 장작을 마당으로 옮겨놓으라고 지시했다. 천도교의 거물인 최린이지만 체신을 돌볼 것 없이 장작을 한 아름씩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시키는 대로 옮겨놓았다. 이제마는 최린의 거동을 마루에서 내려다보며 그의 체성을 파악한 후 그만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소음인으로 진단을 내렸다.

동봉(董奉)의 행림(杏林) 이야기
「신선전(神仙傳)」 등의 책에 실려 있는 것으로, 옛날 중국의 삼국시대 오(吳)나라에 동봉(董奉)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뛰어난 의술로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으며, 환자가 병이 다 나아서 사례를 하고자하면 한사코 돈을 받지 않고 대신 집 뒤에 있는 동산에 살구나무[행:杏]를 심게 하였다. 중병을 앓던 사람은 살구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가벼운 병을 앓던 사람은 한 그루를 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집 뒤의 동산이 살구나무 숲, 즉, 행림(杏林)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살구로써 건강을 지키고, 동봉은 많은 살구를 수확하여 이것을 곡식으로 바꾸어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그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이 숲을 '의사 동봉 신선의 살구나무숲[杏林]'이라 부르면서 동봉을 기리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래하여 오늘날에도 한의원을 행림(杏林)이라고도 한다.

독버섯과 흙탕물 - <약은 가까운 곳에 있다>
조선시대 이야기책인 '대동야승'에 나오는 일화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 유월 유둣날, 한 무리의 부녀자들이 단속사(斷俗寺)라는 절의 계곡으로 피서를 하러 갔다. 한참 물놀이를 즐기다 점심때가 되어 밥을 지었고 누군가가 따온 버섯국도 끓여서 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 마자 갑자기 웃음보가 터지기 시작하는데 웃음을 멈추려고해도 도무지 웃음이 멎지를 않았다.
우연히 이들의 모습을 발견한 단속사의 노스님은 단풍나무 고목에서 돋아난 '소심'이라는 독버섯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고는 어떤 약을 달여 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약을 먹자마자 언제 그랬냐싶게 부녀자들의 웃음이 딱 멈추었다. 단번에 웃음을 멈추게 한 그 신통한 약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그 약은 다름이 아니라 산길의 흙탕물을 떠다가 달인 것이었다.
독버섯 중독에서 부녀자들을 구해놓고 노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산에서 병을 얻었으니 그 병을 낫게하는 약도 반드시 이 산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천지 조화의 섭리입니다."

이 노스님이야말로 음양의 조화를 아는 숨어있는 명의가 아닐 수 없다.

지렁이도 약이 된다
전라도 동복(同福) 지방 어느 양반 댁 미모의 따님 방에 밤이면 미장부가 나타나 밤을 즐긴 후 동이 트기 전에 사라지는 사건이 생겼단다. 이 미남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자는 어느 날 남자 옷깃에 실 끝을 꿰어 놓았단다. 날이 밝은 후 여자는 실을 따라 쫓아갔더니, 실 끝은 심산 중의 산삼(山蔘) 뿌리에 달려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탄생 설화도 있는데, 밤이면 찾아오는 미장부의 옷깃에 바늘을 꽂은 후 다음날 바늘에 꿴 실을 따라 갔더니 커다란 지렁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지렁이와 놀아나다가 낳았다는 인물이 견훤(甄萱)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나오는 산삼이니 오이니 지렁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남성 성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옛날 부녀자들의 인후통(咽喉痛)은 대개 성적불만이 원인이 되어 생긴 병으로 생각하고 남근의 상징인 지렁이를 삶아 먹었으며, 고려말 요승(妖僧)으로 알려진 신돈(辛旽)은 양기를 돕는다고 지렁이회를 즐겼다.
지렁이는 구인(戮蚓)·지룡(地龍)·곡선(曲濂)·완선(拇濂) 등으로 불린다. 구인(戮蚓)이란 언덕(丘)을 끌어내리듯(引) 흙 속에서 터널을 파서 그 흙을 자신이 몽땅 소화해 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요, 지룡(地龍)이란 천룡(天龍)으로 불리는 지네에 대칭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물 속에서도 공기만 잘 통하면 먹을 것 없이도 247일간을 살 수 있으며 또 체내의 수분이 70%나 없어져도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반으로 몽땅 끊어버려도 머리 쪽은 곧 꼬리를 형성하여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용(龍)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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